(어른)복음은 감언이설(甘言利說)이 아닙니다(마10:34~42)-2026.6.28.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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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영상 https://youtu.be/EdPOXyw9uJk?si=nP9vTlHUan3MLwWE
(본문 중)
예수께서는 12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자신은 세상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검으로 인해 가정에는 불화가 생길 것입니다.
35~36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평화를 위해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정에 불화를 주신다니!!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환경을 알아보면, 이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족은 단순한 혈연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경제와 사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공동체였고, 하나의 종교 공동체였습니다.
가족의 종교가 곧 나의 종교였고, 가족의 신념이 나의 신념이 되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한 명이라도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가족 전체와 부닥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에서는 이런 상황이 종종 발생하였습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기도 하였고, 마태복음이 쓰여졌다고 예상되는 AD80년쯤에는 기독교가 유대교에게 큰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박해 가운데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가족과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도 이런 일이 적혀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맹인을 고치셨고, 그를 고친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그리고 눈을 뜬 맹인을 추궁합니다.
맹인을 추궁해서 예수님의 잘못을 드러내고, 죄인으로 몰아갈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맹인은 바리새인들의 추궁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맹인의 부모를 불러옵니다.
부모를 추궁하여 맹인에게 예수님의 잘못을 드러낼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이 때 맹인의 부모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가 다 컸으니 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말합니다.
자식을 감싸지 않은 것입니다.
가족 내에서 불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믿음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들의 가정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면, 말그대로 만사형통의 복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무조건적인 평화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갈등을 일으키고, 그 갈등은 가족 내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검과 같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4장 12~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검과 같은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뜻이 바른 것인지 아닌지, 우리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지 아닌지… 우리 모두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서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합니다.
우리의 뜻, 욕심, 마음, 생각…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 간에도 불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가려졌던 것들이 나타나고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과거나 지금이나 동일한 일입니다.
물론 지금은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처럼 모든 것을 하나로 뭉치며, 하나되는 공동체를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인해서 많은 것들이 불편해 집니다.
가장 비근한 예로 주일이 그렇습니다.
주일에 교회를 가기를 원하는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에게는 갈등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사회 생활의 방식이나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생깁니다.
복음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좋은 것이 좋다는 말로 넘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르틴 루터도 이를 경험하였습니다.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루터에게는 모든 것이 갈등이었습니다.
가족과의 갈등, 친구와의 갈등, 사제지간의 갈등, 교회와의 갈등… 심지어 황제와 교황과의 갈등도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만사형통의 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믿음은 갈등을 유발하고, 관계를 어그러뜨립니다.
말씀의 검이 모든 것을 드러내고 밝히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아가고, 우리를 그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37절에서 자신을 가족보다 더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8절에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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